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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에, 어서 와
᯽ 아침
⸙ 묵은 흔적들을 지우며
한밤중의 집은 원래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고요 속에서 하나둘씩 손을 대다 보면, 정리해야 할 것들이 끝없이 튀어나왔다. 창틀의 먼지, 서랍 속 엉킨 물건들, 주방의 흐릿한 얼룩들. 손을 대면 댈수록,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형체를 드러냈다. 방금 닦아낸 듯한 거울에서도 희미한 손자국이 보였고, 정리한 듯 보였던 서랍 속에는 끝까지 밀어 넣지 않은 종이 몇 장이 나풀거렸다. 가구의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손을 문지르며, 다시 한 번 걸레를 들었다.
처음으로 내 공간을 남을 위해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엄마 외에는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이곳. 내 방, 내 부엌, 내 테이블.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밍이 오기로 한 날만큼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사람이 이곳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 생각이 집 안의 구석구석을 다르게 보이게 만들었다. 내 방은 언제나 충분히 괜찮은 공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 먼지뿐일까. 벽 한쪽에 기대어 있던 오래된 책,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언젠가 쓰려고 했던 메모지, 언젠가는 먹겠지? 하면서 보관해두었던 1년 넘은 양념통. 나는 그 흔적들을 지우듯 천천히 닦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정리해도, 이 공간에는 여전히 나라는 사람이 쌓아온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참을 걸레질하다 문득, 집 안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창을 열어 바깥 공기를 들이니, 선선한 새벽바람이 들어왔다. 먼지 가득한 집이 아니라, 사람을 맞을 준비를 마친 공간이 되었다. 빛이 없는 새벽이었지만, 내 손길이 닿은 곳마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밤의 흔적이 지워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초조하지 않았다.
⸙ 정성이 깃든 한 끼
새벽의 어둠 속에서 불을 켰다. 주방 한쪽에서 냄비를 꺼내며 밍을 떠올렸다. 조용한 주방에서 정성스럽게 차려주던 밍의 밥상, 한 접시 한 접시 조심스럽게 놓였던 따뜻한 음식들. 그날의 밥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밍에게 그런 온기를 돌려주고 싶었다. 손님을 위한 식탁은 처음이었다. 맛은 자신 없었지만, 건강만큼은 약속할 수 있는 한 끼를 만들기로 했다.
싱싱한 채소를 씻고, 밍의 체질에 맞춰 약재를 골랐다. 불 위에 전골 냄비를 올리고, 육수를 천천히 끓였다. 국물이 맑아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적당히 끓일 생각이었는데,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다. 국물이 푸욱 우러날 때까지, 새벽 공기 속에서 한 그릇의 온기가 천천히 만들어졌다. 여름이었다면 동이 틀 무렵까지, 하지만 오늘은 새벽 어둠 속에서 나만의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국물의 향이 집 안을 감싸기 시작할 때,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앉아 쉴 수 있었다. 부엌 의자에 앉아 김이 올라오는 냄비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오래 요리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음식이란,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는 일이라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어쩌면 나보다 밍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나를 위해 무언가를 챙겨주는 사람. 나는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려줄 수 있을까.
이윽고 국물이 깊어진 냄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안에 담긴 건 단순한 재료가 아니었다. 새벽을 지새우며 떠올린 수많은 생각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들여 만든 정성, 그리고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작은 바람.
⸙ 첫 손님, 가득한 마음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몸은 지쳤지만, 집 안의 공기는 이전과 달랐다. 어쩌면 공간이라는 것도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밍을 기다렸다.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잠을 잤지만, 피곤함은 희미해졌다. 그리고 주차장 입구에서 내려오는 밍의 차가 보였다. 주차도 하기 전에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 표정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지.
밍은 한짐 가득한 것들을 안고 있었다. 손수 구운 휘낭시에와 고구마 파운드케이크, 밍 어머니가 직접 담그신 단호박 식혜, 같이 나눠 먹을 고기와 채소와 과일과 간식들. 그리고 편지 두 통.
밝은 아침 햇살 아래, 그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들, 생각하지 못한 것들. 밍은 언제나 이렇게 내 곁에 무언가를 채워넣는다. 나는 가만히 바라보며, 이 많은 것들 속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걸 다 가져왔어?”라고 묻지는 않았다. 그런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밍은 항상 이렇게 나를 생각하고, 이렇게 준비하고, 이렇게 채워주는 사람이다.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밍은 늘 먼저 건네준다.
주방 한쪽에 밍이 가져온 것들을 정리했다. 선물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것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새벽 내내 준비했던 전골 냄비가 떠올랐다. 밍은 조용히 식탁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 오후를 위한 짧은 쉼
집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몇 시간 전까지 새벽의 적막을 깨우던 물소리, 칼질 소리,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마치 오랜 시간 머물던 손님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햇살이 부드럽게 기울어 가고 있었고, 우리는 그 빛을 따라 조용히 몸을 맡겼다.
밍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움직였던 아침이 지나고, 이제야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몸은 분명 피곤했지만, 마음 한편은 알 수 없는 따뜻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오늘 아침의 순간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밤늦도록 청소하던 손길, 밍을 위해 끓이던 국물의 향기, 처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며 느꼈던 낯설지만 설레는 감정들. 그리고, 차 안에서 한짐 가득한 선물들을 들고 내리던 밍의 미소까지. 그 순간순간들이 마치 물결처럼 부드럽게 밀려왔다.
눈을 감은 채로, 밍이 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었다. 일정한 호흡, 아주 가볍고 평온한 리듬. 나도 천천히 그 호흡에 맞춰 숨을 들이마셨다. 따뜻한 공기가 몸을 채우고, 서서히 긴장이 풀려나갔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아침부터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온 것처럼, 완벽한 균형 속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지금은 그냥 쉬어도 괜찮아. 넌 내가 브레이크를 안 잡아주면 경주마처럼 달려나갈 것 같아.’ 밍이 가끔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피곤해도, 바빠도,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어도, 한순간 멈추어 숨을 고르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고요한 아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모든 걸 멈추고,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오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점심
⸙ 새벽부터 준비한 한 끼, 정성의 맛
보글보글, 깊고 묵직한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김. 몇 시간 동안 불 위에서 천천히 우러난 진한 향기가 공기를 감쌌다. 그 안에는 아침까지도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졌던 손길이, 재료 하나하나를 다듬으며 떠올렸던 생각들이,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기꺼이 즐기고 싶었던 내 마음이 녹아 있었다.
밍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내가 집에서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을 (엄마 외)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나누고, 내 손끝에서 만들어진 한 끼를 온전히 맛보는 순간이었다. 밍은 수저를 들어 국물 한 모금을 삼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좋았다. 맛있다는 말보다, 한 마디의 칭찬보다, 그저 조용히 음식에 집중하는 모습이 더 감사했다. 밍이 숟가락을 한 번 더 떠올릴 때마다, 이 음식이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모금 한 모금, 정성이 배어 있는 국물이 몸을 데우듯, 우리 사이에도 묵묵한 따뜻함이 번져갔다.
내가 밍네 집에서 대접받았던 따뜻한 식사들처럼, 이 보양식도 밍의 기억 속에 하나의 조용한 장면으로 남을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밍이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남김없이 비운 것을 보고서야, 나는 다시 한 번 이 한 끼가 제대로 완성되었음을 실감했다.
⸙ 기억과 현실이 겹쳐지는 순간
“아, 밍은 야구를 좋아하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듯, 밍이 중계방송을 찾았다. 밍이 좋아하는 팀의 연습경기가 시작되었다. 화면 속에서 선수들이 몸을 풀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화면에서 들려오는 해설가의 나직한 목소리와 그 뒤로 깔리는 관중의 소음이 식사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익숙한 소리들 속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소리는 너무 오랜만이었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일요일 오후가 겹쳐 보였다. 아빠가 TV를 틀어놓고 점심을 먹던 시간. 엄마가 부엌에서 김치찌개를 끓이며 국자를 휘젓던 소리, 프라이팬에서 계란이 부서지는 기름의 소리, 그리고 테이블 위로 옮겨지는 그릇들. 나는 항상 그 소리들 속에서 자랐다. 그런데 지금, 밍과 함께 앉아 있는 이 순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기억을 불러왔다.
나는 밍의 옆에서, 어쩌면 아빠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빛이 테이블 위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도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는 듯했다. 야구 중계를 보며 밥을 먹는다는 것, 좋아하는 팀의 승패에 따라 밥맛이 달라지는 것, 그리고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과거를 조용히 건드리는 순간, 현실과 기억이 얽히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그저 짧은 점심 한 끼일 뿐인데, 지금 이 시간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닿아 있었다. 밍은 나의 기억을 불러오는 사람이다. 아주 익숙한 감각을 다시 선명하게 만드는 사람. 그리고 나는, 그런 밍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바랐다.
᯽ 오후
⸙ 분홍빛 가득한 쇼핑백, 설레는 디저트
점심을 마친 후, 우리는 평촌 롯데백화점의 노티드로 향했다. 밍이 미리 예약해 둔 “생딸기 파티 피크닉 세트”. 나를 위해 “생딸기 말차 피크닉 세트”도 함께 준비해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심장이 몽글몽글해졌다. 내가 녹차를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주고, 미리 예약까지 해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태어나서 디저트라고 해봐야 오예스, 초코칩 쿠키, 보급형 모나카, 파리바게트에서 대충 골라 사는 빵들이 전부였다. 노티드라는 이름은 신문 기사에서만 보았고, 그저 낯설고도 화려한 세계였다. 하지만 지금, 그 디저트를 직접 먹게 되었다 (!)
매장에 도착해 이름을 대고 기다렸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마치 선물 받기 직전의 아이처럼. 내 이름이 불리고, 분홍색 쇼핑백이 우리 앞에 놓였다. 안에는 딸기가 가득한 디저트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기도 전에 이미 기분이 부풀어 올랐다. 밍과 나는 박스를 들여다보며 소리 없이 감탄했다. 케이크 위에 촘촘히 박힌 생딸기, 부드러워 보이는 크림, 말차의 깊고 짙은 초록빛. 설렘이란 이런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약간 어수룩한 알바생은 물티슈도, 티슈도, 커트러리도 챙겨주거나 안내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된 건, 이후 이 화려하면서도 먹기 힘든 도넛을 흘리면서 먹을 때이다.) 차가 많을 것 같아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밍은 쇼핑백을 들고 조심스럽게 지하철에 올랐다. 달리는 차 안에서 이 작은 쇼핑백이 무언가 특별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손으로 가볍게 매끈한 손잡이를 쥐어보는 밍의 손이 보였다. 마치 아이처럼, 작은 기쁨을 품고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 고즈넉한 미술관, 봄의 온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미술이나 예술에 대해 깊이 아는 편이 아니어서, 이곳을 찾은 것도 거의 6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이곳은 여전히 조용하고, 여전히 고즈넉했다.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흐르는 바깥 세상과 달리, 이곳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시간을 담아두고 있었다.
하늘은 파랬고, 공기는 차가웠지만 날이 따뜻했다. 초봄의 햇빛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온도로 우리를 감쌌다. 걸을 때마다 발끝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스쳤다. 마치 겨울과 봄이 서로 혼재된 듯한 날씨.
그때 어디선가 몽환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멀리 보이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립고도 묘한 음률. 밍이 말했다. “저 알루미늄 남자가 노래 부르는 건 처음 봐.”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공간에서, 저 조각상이, 저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하듯이, 노래는 공중을 떠다니며 스며들었다.
우리는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물가에는 커다란 잉어들이 떠 있었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호숫가에 멈춰 서자, 그들은 일제히 몰려들었다. 사람이 있으면 무언가 던져줄 거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미안, 줄 게 없네.” 밍과 나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잉어떼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순간, 밍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여러 장 찍었다. 그리고 가만히 폰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내 폰에만 보관해야지.” 나만 보고 싶어서. 그래도, 당사자인 밍에게 보내주는 건 예의라고 생각해서 모두 보내줬다.
⸙ 두 여자, 도넛, 그리고 웃음
손끝에 닿는 바람이 아직은 차가웠다. 그래도, 햇살이 충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은 딱 그 사이. 우리 앞에는 분홍빛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안에는 생딸기로 뒤덮인 케이크와 크림이 부드럽게 흐르는 도넛이 들어 있었다. 피크닉 매트를 깔 것도 아니었고, 테이블이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바닥, 적당한 그림자, 그리고 우리가 있었다.
포크도, 티슈도, 나이프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세상 모든 노티드 알바생들이여.. 잘 보거라. 너희가 그 한마디를 잊으면 고객이 이렇게 된 다는 것을). 밍이 봉지를 열어 도넛을 꺼냈다. 크림이 둥글게 얹힌 표면이 반짝였다. 나는 티슈가 없는 걸 떠올리며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밍이 손가락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괜찮아, 도넛은 이렇게 먹는 거야.”
우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작은 아이처럼 손으로 도넛을 집어 들었다. 크림이 손가락에 닿는 감촉이 생경했다. 손에 묻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달았다. 딸기의 새콤한 향이 스며들었다. 혀끝에서 퍼지는 단맛이 묘하게도 낯설었다. 나는 평소에 이렇게 달콤한 걸 먹었던가.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밍이 도넛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아, 흘렸다!”
입가에 크림이 묻은 채로 밍이 허겁지겁 손을 흔들었다. 티슈가 없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모양이었다. 밍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괜찮아, 털면 돼.” 손끝에 묻은 크림을 보고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아니면 그냥 빨아먹으면 되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도넛을 한 손에 쥔 채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따라 해봤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살짝 닦아내서 혀끝에 올려놓았다. 생각보다 달콤한 것 같았다. 밍 입술 위에 묻은 크림이 더 맛있어 보여서 내가 한입 먹어봤다. 그런 것조차도 웃음이 났다.
도넛을 먹는 내내 우리는 웃었다. 크림을 흘릴 때마다, 손에 잔뜩 묻을 때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서로를 쳐다볼 때마다. 바람이 불어도, 바닥이 조금 차가워도, 도넛을 손으로 쥐어 먹는 게 어색해도 상관없었다. 우리 주변에는 오직 웃음만이 가득했다.
나는 손가락에 남은 크림을 닦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다. 밍도 그랬다. 그렇게 한 입 베어 물고, 또 한 입 베어 물고, 두 명이서 네 개의 도넛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크림이 잔뜩 묻은 손을 흔들며, 우리는 깔깔거렸다. 옆에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햇빛이 반짝거리고, 도넛의 단맛이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마지막 1mm까지 쪽쪽 빨아 삼킨 크림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던 이 공기마저도.
나는 생각했다. ‘도넛은 이렇게 먹는 거라고, 밍이 그랬다.’
그리고 정말, 도넛이란 이렇게 먹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P.S.
도넛을 다 먹고 나서 한참을 웃었을 때, 밍이 갑자기 말하던 걸 멈추고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나랑 대화하는 도중에 한 눈을 판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배우 같았다고 했다. 밍은 급히 인스타그램을 열어 화면을 내밀었다. “이 사람인 줄 알았어. 어쩌면 맞을 수도 있어.” 우리는 잠시 멀어져 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다가 다시 도넛으로 돌아왔다. 도넛은 여전히 달았고, 손끝에는 아직 크림이 남아 있었다.
᯽ 초저녁, 그 이후
⸙ 모던하우스, 계절을 담은 그릇들
미술관을 나서기 전,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었다. 손끝에 남아 있던 크림의 감촉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비누 거품이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물줄기가 가볍게 흘러내렸다. 마치 이 짧은 순간조차도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도넛을 먹으며 웃던 기억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게 아니라, 손끝에서 온기를 남기며 스며드는 듯했다.
밖으로 나와 백화점으로 향했다. 모던하우스에 가서 밍이 우리 집에서 쓸 컵을 고르고, 안주로 먹을 샐러드와 치즈를 사기로 했다. 익숙한 길이었다. 혼자 걸을 때는 빠르게 지나쳤던 거리, 엄마와 함께일 때는 조곤조곤 얘기하며 걸었던 길.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밍과 함께 걷는 길은 새로운 결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걷고 싶은 길이었다.
낯설지만 좋은 감각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걸 설렘이라고 부르는 걸까. 뭔가 가벼운 긴장감과, 그럼에도 편안한 안정감이 뒤섞여 있는 이 감각을. 머릿속이 복잡해질 즈음, 모던하우스가 있는 8층에 도착했다. 모던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봄이 눈앞에 펼쳐졌다. 부드러운 파스텔 색상의 접시들,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은은한 빛, 벽 쪽에 걸린 밝은 컬러의 패브릭들. 계절이 이렇게도 선명하게 그릇과 소품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모던하우스를 좋아한다. 계절을 그릇에 담아내는 공간. 이 컵, 저 컵 만져보다가, 가장 ‘밍’ 스럽고 ‘류’ 스러운 것을 샀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한 층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금방 도착할 거리였지만, 굳이 빙글빙글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천천히 내려가면서 구경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바닥까지 내려가 마트로 향했다. 샐러드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신 크림새우와 단호박 훈제오리를 집어 들었다. 순간, 이걸로 충분할까 싶었지만, 금방 ‘뭐, 괜찮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음식이 아니라, 함께 먹는 순간이니까.
⸙ 하이볼, 그리고 안양집에서의 첫 홈파티
마트를 나와 우리 집 1층 편의점에 들렀다. 하이볼을 몇 캔 골랐다. 다 마셔보고 나서 쓰는 거지만, 술의 도수는 맛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레몬과 라임은 도수가 높았고, 오렌지, 감귤, 청귤, 금귤, 유자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금귤은 ‘낑깡’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았고, 청귤은 어딘가 치약 맛이 났다. 다시 마신다면 레몬과 유자만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캔을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집 안의 공기가 가볍게 흔들렸다. 낮의 따뜻한 온기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이 어수선하게 남아 있었다. 코트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나눠 맡았다. 밍은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나는 싱크대 앞에서 각종 음식들을 준비했다.
하이볼 캔을 따자, 정말로 과일이 동동 떠올랐다. 잔을 마주 들고, 우리는 가볍게 부딪혔다. 짧은 소리와 함께, 오늘 하루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다. 첫 모금을 넘기자, 미세한 알코올의 따뜻함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술이 들어가면 대화는 한층 더 부드러워진다. 장난스러운 말들이 먼저 떠올랐다가, 이내 진지한 이야기들이 그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되짚었고, 함께 나눈 장면들을 이야기했다. 낮의 미술관과 잉어들, 도넛을 먹으며 흘린 크림, 그리고 나란히 걸었던 백화점과 모던하우스의 그릇들까지. 시간은 차곡차곡 쌓인 대화들 위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술이 천천히 돌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더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가벼운 농담에서 시작해서, 과거의 기억으로 이어지고, 가끔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감정을 건드리기도 한다. 우리는 울고 웃었다. 순간순간 긴장이 풀어졌다가 다시 단단해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기억들은 우리를 차분하게 만들었고, 어떤 이야기는 말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술 한 모금이 감정을 부드럽게 풀어놓았고, 시간은 알코올처럼 천천히 녹아갔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분명 그동안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무언가 더 깊어지고, 무언가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이볼을 마셨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이볼 캔 위에 이슬이 맺히는 것 처럼, 우리의 시간도 천천히, 부드럽게 흘러갔다.
⸙ 단단한 사람, 그리고 따뜻한 존재
술이 들어가면, 마음의 결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가볍게 치던 농담이 한 겹 벗겨지고,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조용히 얼굴을 내민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쌓인 기억들, 조금은 차마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감정들까지. 그런 순간에도 밍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자주 흔들리는 사람이다. 작은 변화에도 쉽게 동요하고, 보이지 않는 불안을 짊어진 채 앞으로 걸어가는 편이다. 그런 나와 달리, 밍은 단단했다. 어릴 적부터 단단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던 걸까. 하지만 그 단단함은 차갑지 않았다. 누구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단단함이라는 점이 더 특별했다. 불안한 나를 끌어안고도 함께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끝없이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밍은 늘 나보다 천천히 말한다. 조용히 듣고, 한 박자 늦게 대답한다. 하지만 그 대답에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무게가 실려 있다. 감정을 급하게 쏟아내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깊은 온기가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그렇다고 불필요하게 무겁게 만들지도 않는다. 불안해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는 사람.
술이 한 모금씩 몸에 스며들면서, 대화도 깊어졌다. 우리는 웃기도 하고, 오래된 기억 속으로 잠기기도 했다. 캔 속 알콜음료가 서서히 식어가듯, 마음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감정들도 천천히 풀어졌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떤 말들은 가슴을 무겁게 하지만, 어떤 대화들은 오래도록 따뜻한 무게로 남는다.
나는 여전히 흔들릴 것이고, 불안 속에서 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밍의 존재를 떠올릴 것이다. 단단하지만 다정한 사람, 그리고 흔들리는 사람을 따뜻하게 붙잡아 주는 존재.
P.S.
내일 아침에는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완전한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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