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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움을 뒤로 하고
᯽ 아침
⸙ 깊은 잠과 사라진 기록
잠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두 눈을 감자마자 가벼운 어둠이 나를 감쌌다. 이틀 연속 네 시간 남짓한 짧은 수면. 피로는 얇은 막처럼 몸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조금 달랐다. 나는 일찍 잠들었고, 깊숙이 가라앉았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깨어나 보니 몸이 놀랍도록 가벼웠다.
손목을 들어 워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수면 점수는 없었다. 워치가 절전 모드로 바뀌면서 기록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여섯 시간을 넘게 잤다는 것만 남아 있었다. 공허한 숫자 하나.
옆에 누운 밍이 졸린 눈으로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나보다도 더 아쉬워하는 듯했다. 잠 속에서도, 깨어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조용히 나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잠결에 기대던 무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떤 밤은 기록되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데, 숫자가 없으면 존재감마저 흐려지는 것 같았다.
⸙ 새벽의 흔적, 분홍빛의 선물
새벽의 방문자,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다녀간 쿠팡맨. 문밖 어딘가에서 짧은 정적과 함께 작은 상자가 내려놓였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분홍색 텀블러가 그 흔적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둥글고 매끄러운 표면이 부드러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레 텀블러를 감쌌다. 밤의 잔열이 남아 있는 듯한 차가운 감촉. 어딘가에서 출발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지금 여기에 도착한 시간들이 손끝을 따라 스며드는 것 같았다.
밍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나보다 먼저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녹차를 많이 마신다는 사실도, 허니두유라떼를 자주 마시는 버릇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억을 형태로 남기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초록색 텀블러와 같은 모양. 색만 다를 뿐 같은 디자인. 나는 가만히 텀블러를 바라보았다. 짝을 맞춘 듯한 조합. 자연스럽고 조용한 배려. 이건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 하루의 결을 알고 있다는, 작은 신호 같았다.
손에 감긴 분홍빛의 무게가 새벽의 잔여처럼 남아 있었다.
⸙ 정갈한 손길
싱크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잦아들었고, 조용한 아침의 공기가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오른 편에 서서 조용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칼을 쥔 그녀의 손끝에서 공기가 달라지는 듯했다. 평소의 움직임보다 더 신중하고 조용했다. 그녀는 과일을 깎을 때면 온전히 그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불필요한 힘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칼을 움직였다.
사과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칼로 큼직하게 썰어 접시에 올렸다. 반들반들한 붉은 껍질이 조명을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밍은 사과를 껍질째 먹는 걸 좋아한다. 난 지금까지는 늘 껍질 다 까고 먹었었는데, 밍과 함께 하면서 껍질도 같이 먹게 되었다. 신맛이 살짝 도는 껍질과 속의 단맛이 섞이는 느낌이 좋다.
칼날이 과육과 껍질 사이를 조심스레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껍질이 길고 매끈하게 떨어졌다.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곡선. 단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는 선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과일을 깎는 사람을 우리 아빠 빼고 처음 본다. 아빠도 과일을 깎을 때 한쪽 발을 살짝 구부리고, 균형을 맞추며 천천히 칼을 움직였다. 귤 껍질을 길게 이어서 벗기면 행운이 온다고 했었다. 배를 깎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칼끝이 껍질과 과육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면, 긴 선이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고 했다.
밍도 그런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손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껍질을 벗겨냈다. 껍질이 싱크대 가장자리에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깎은 배를 한입 크기로 썰어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내 앞에 놓아두었다.
나는 배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촉촉한 단맛이 천천히 혀끝으로 퍼졌다. 사과와는 다른, 더 차분하고 조용한 단맛.
᯽ 오전
⸙ 휘낭시에 반죽을 준비하며
아침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했다. 창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부엌 안 공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따뜻했던 음식 냄새가 엷어지고, 차갑고 조용한 기운이 그 자리를 채웠다. 오늘은 오븐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밍이 휘낭시에를 만들기로 했다.
그녀는 두 종류의 반죽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는 녹차, 하나는 오렌지 루이보스.
조심스럽게 볼을 꺼내고, 하나씩 재료를 준비했다. 박력분, 비정제 설탕, 아몬드가루, 계란 흰자. 정확한 무게를 맞추려는 그녀의 손끝이 신중했다. 밀가루가 볼에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설탕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계란 흰자는 투명한 막을 유지한 채 조용히 흘러내렸다. 내가 종종 생각했던 (하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흰자를 아끼는 방법이 있었는데, 밍은 그걸 당연한듯이 실천했다. 내가 밍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그녀가 버터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 번에 무게가 맞춰지지 않았다. 작은 조각을 잘라 저울 위에 올렸다. 좀 부족했나다. 다시 조절하고, 다시 올리고, 다시 또 올렸다. 버터는 손끝에서 점점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실내 공기에 닿을수록 형태가 달라졌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버터 무게를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저울 위의 버터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한 무게를 맞추기 위해 반복적으로 자르고, 올리고, 내려놓는 과정. 관계도, 감정도, 이런 과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너무 가볍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조금 부족하면 채워야 하고, 넘치면 덜어내야 한다는 것.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버터 조각을 저울에 올렸다. 이제야 정확한 무게가 맞춰졌다.
⸙ 버터의 향, 기억의 그림자
버터를 팬에 올리는 순간, 부엌의 공기가 변했다. 차가웠던 버터가 가장자리부터 녹아내렸다. 매끄럽던 표면이 천천히 주름지며 액체로 바뀌었고, 황금빛 거품이 가득 일었다. 기포가 톡톡 터질 때마다 미세한 파동이 기름 위를 미끄러졌다. 온기가 닿자 버터의 색이 깊어졌다. 맑고 투명했던 것이 서서히 빛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향이 퍼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스치는 듯한 고소함이었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공기 속으로 짙은 것이 번졌다. 견과류를 볶을 때처럼 묵직하고 따뜻한 향. 익숙한 감각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몸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어제 김밥전을 부칠 때와 비슷한 감각. 팬 위에서 기름이 데워질 때마다 공기 속에 남겨졌던 무언가가 다시 떠올랐다. 어제는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오늘은 다르다. 향이 더 오래 머물렀다.
어느 순간부터 이 향은 나를 조금 슬프게 했다. 따뜻한 것인데도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냄새였다. 기억의 형태를 알지 못하면서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 향이 퍼질수록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잡아내지 못했지만, 알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머릿속을 환기시키려는 듯 괜히 말을 더 많이 했다.
“버터 냄새 좋다, 그치?”
밍이 조용히 팬을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팬을 흔들며 녹아가는 버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떠오르는 감정을 지우려 애썼다. 하지만 향은 여전히 부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렇게도 선명한 것이 있는데, 왜 어떤 기억들은 쉽게 흐려질까. 나는 팬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버터를 바라보았다. 그 온기 속에서, 기억도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 오렌지 루이보스, 향을 반죽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그릇에 찻잎을 담았다. 오렌지 루이보스. 적갈색 잎이 얇고 부드럽게 엉켜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문지르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루가 되어버릴 듯한 마른 감촉. 바람에 흩날리듯 가벼운 잎들이 손끝을 스쳤다.
밍이 블렌더 뚜껑을 열었다. 나는 찻잎을 조심스럽게 흩어 넣었다. 뚜껑이 닫히고, 버튼이 눌렸다.
위이이잉—
날카로운 소음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작은 찻잎들이 회전하며 부서졌다. 처음에는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기계 소음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오렌지 향이 공기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
차를 우릴 때처럼 서서히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빠르고 선명하게 터졌다. 잘게 부서진 찻잎에서 오렌지 껍질을 문지를 때처럼 시트러스한 향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가벼웠지만, 점점 짙어졌다.
나는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 향이 휘낭시에에 담기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루가 된 찻잎을 체에 내리자, 적갈색이었던 찻잎이 한층 더 옅어진 모습으로 볼 안에 떨어졌다. 밀가루와 설탕, 아몬드가루 사이에서 새로운 색이 보태졌다. 밍이 조심스럽게 반죽을 저었다. 찻잎 가루가 퍼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한 번 저어질 때마다 색이 짙어지고, 향이 반죽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휘낭시에의 형태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향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 반죽을 쉬게 하고, 하루를 채우다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휴지를 시켰다.
“이제 반죽을 좀 쉬게 해야 해.”
밍이 그렇게 말하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든 듯, 부엌이 조금 더 조용해졌다. 반죽은 냉장고 안에서 시간을 가질 것이고, 우리는 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식탁에 앉아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 반죽기 지나갔던 반죽의 부드러운 흐름, 체 위에서 내려앉던 곱게 간 찻잎, 팬에서 일렁이던 버터의 빛깔. 그 모든 것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할 일이 없었다.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차갑게 가라앉아야 하는 시간. 기다려야만 완성되는 것들이 있다. 반죽도 그렇고, 어떤 감정들도 그렇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점심 준비를 돕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오렌지 루이보스 향이 가벼운 흔적처럼 따라왔다.
᯽ 점심
⸙ 단호박 식혜, 마음을 담아 건네는 한 잔
단호박 식혜가 잔에 채워졌다. 옅은 황금빛이 잔을 감싸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시자, 익숙하지만 새로운 단맛이 혀끝에서 번졌다. 부드러운 단호박의 향과 은은한 엿기름의 단맛이 입안에 천천히 퍼졌다. 단맛이 강하지 않았다. 단호박이 품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미로움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이 식혜는 밍네 어머니께서 직접 담그신 것이다.
밍의 어머니는 손맛이 좋으신 분이다. 시간이 담긴 음식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 정성이 깃든 요리는 맛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도 함께 전달된다는 걸 아시는 분.
그리고 밍은 그 마음을 늘 나에게도 나눠준다.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음식은 전달된다.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 한 모금의 식혜 속에 어머니의 손길이 있고, 그것을 나누는 밍의 마음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정성을 한 모금씩 삼키며 느낀다.
이 감정을 밍도, 밍의 어머니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이 한 잔에 담긴 감사함이 단순한 맛이 아니라, 온기로 전해졌으면 좋겠다. 음식이 그렇듯이, 마음도 그런 방식으로 나눠질 수 있다면.
나는 천천히 마지막 한 모금을 천천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감촉과, 그 뒤에 남겨지는 단맛. 감정도 그렇게, 서서히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 시간이 더해져 깊어진 국물, 더 익숙해지는 마음
어제 남은 소고기 전골을 다시 데웠다. 한 번 끓어올랐던 국물이 다시 불 위에서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국물이 데워지면서 어제보다 더 깊고 진한 향이 퍼졌다.
“이런 건 하루가 지나야 더 맛있어져.”
그 말이 틀리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국물 속에 고기와 채소가 어제보다 더 부드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간이 골고루 배어든 국물은 한 숟갈 뜨는 순간 입안에서 감칠맛을 퍼뜨렸다.
밍이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맛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한 숟갈 더 떴다.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밍이 잘 먹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같이 식사하는 사람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밍이 한입 한입 떠먹을 때마다, 내 마음도 조금씩 차올랐다. 가끔은 밍이 음식을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소고기 전골의 국물은 뜨거웠다. 국자로 한 번 저을 때마다 안에 들어 있던 고기와 채소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어쩌면 이 국물과 닮았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깊어지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스며들어 있을 것 같은 관계. 시간이 지나야 더 완벽해지는 맛.
배부르게 먹고 나서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식탁 위에는 빈 그릇과 국자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식사의 여운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소파 위에 스며든 숨소리, 고양이의 시선
배부름이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따뜻한 국물로 속을 채우고, 마지막 한 입까지 남기지 않고 먹은 식사는 우리를 부드럽게 가라앉게 했다. 긴장이 풀리고, 생각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깨끗이 정리된 식탁 위로 흐르는 공기는 나른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파로 향했다. 푹신한 쿠션이 몸을 감싸 안았다.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팔과 다리가 서로에게 기대어 가라앉았다.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온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하루의 어느 시간보다도 조용한 순간이었다. 바람 소리도, 창밖의 소음도, 부엌에서 남아 있던 식사의 향기도 모두 흐려졌다. 오직 느리게 섞여 가는 숨소리만이 또렷했다.
고양이들이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파의 모서리, 창가의 볕이 드는 자리, 거실 테이블 아래. 각자의 위치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관찰이라기보다는, 이해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고양이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감정은 말 없이도 전해진다는 것을. 서로에게 기댄 채 아무런 말이 없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오간다는 것을.
우리 또한 그 속에 있었다.
부드러운 천 속으로 숨소리가 스며들었고, 부드러운 공기 속으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 오후
⸙ 정성의 단위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이어졌다. 오븐은 아직 차갑고, 냉장고 안에는 아침에 준비한 휘낭시에 반죽이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밍이 냉장고 문을 열어 반죽이 담긴 짤주머니를 꺼냈다. 손에 쥐자마자 짤주머니 표면에 맺힌 찬 기운이 밍의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오븐 팬 위에 정리된 틀을 앞에 두고, 밍은 조심스럽게 반죽을 짜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짤주머니를 쥔 손이 흔들림 없이 움직였다. 반죽이 틀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과정이 묘하게 조용했다. 1g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추는 모습. 반죽이 차오르는 높이도, 그 양도 모두 균일했다. 마치 손끝에서 무언가를 조각해 내는 듯한 정밀함이었다.
아, 내가 먹던 휘낭시에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구나.
이 과정을 내 눈으로 보니 더욱 감사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찾던 그 달콤한 맛이 이제는 다르게 다가올 것 같았다. 저 작은 무게 하나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는지, 어떤 정성이 쌓여 있었는지를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가볍게 삼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밍은 내 몫만이 아니라, 우리 엄마의 몫까지도 만들었다. 녹차 맛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를 위해그녀는 한 개의 틀을 따로 채웠다. 나는 그 장면이 조금 벅찼다. 그녀가 나를 아끼듯, 내 가족에게도 같은 마음을 내어준다는 것.
나는 그 순간의 마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이 모든 마음을, 내가 받은 이 따뜻한 마음을, 밍도 꼭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밍.
⸙ 오븐에서 퍼지는 향
반죽을 채운 팬을 오븐에 넣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오븐 안에서 천천히 온도가 오르고, 반죽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동안 부엌은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 고요함은 정적이 아니라, 부드러운 기대가 깃든 순간이었다.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버터와 설탕이 녹아 만들어내는 깊은 풍미, 반죽 속에 스며든 오렌지 루이보스의 향이 차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삐-삐-
오븐 타이머가 울리는 순간, 밍이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오븐 장갑을 끼고 문을 열었다. 따뜻한 열기가, 그 속에 담긴 향기가 밖으로 퍼졌다. 오븐 틀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기대가 묻어났다.
“잘 구워졌다!”
노릇하게 부풀어 오른 휘낭시에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밍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이 참 좋았다. 빵이 구워지는 이 작은 과정 속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 이 작은 성공에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
그 따뜻함이 내게도 전해졌다.
나는 밍이 신중하게 틀에서 휘낭시에를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금 이 순간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븐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열기를 감당하는 모습, 잘 구워졌는지 확인하려고 틀을 기울여보는 모습,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순간까지도.
⸙ 나누어진 조각, 공유하는 온기

“따뜻할 때 먹어봐.”
밍이 갓 구운 휘낭시에를 내밀었다. 오븐에서 막 꺼낸 빵은 손바닥 위에서 미세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아직 틀에서 완전히 식지 않은 결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한입 깨무는 순간, 겉이 바삭하게 부서졌다. 얇은 껍질이 가볍게 으깨지며 속의 부드러움이 혀끝으로 번졌다. 버터의 풍미가 먼저 퍼졌고, 그다음에 오렌지 루이보스의 향이 따라왔다. 너무 강하지 않게, 하지만 희미하지도 않게. 차를 우릴 때 서서히 피어오르는 향처럼, 입안에서 천천히 스며들었다.
나는 밍에게도 한입 먹어보라고 휘낭시에를 내밀었다. 그녀도 반대편 끝을 배어 물었다.
짧은 순간, 서로의 온도가 닿아 있던 빵의 중간 지점.
그렇게, 우리가 양쪽 끝을 조금씩 베어 문 휘낭시에가 채망 위에 남았다.
어딘가 우스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묘하게 따뜻했다. 같은 빵을 나눈다는 것, 같은 온도를 공유한다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는 것. 우리는 같은 것을 맛보고 있었고, 같은 기억을 쌓고 있었다.
갓 구운 휘낭시에가 식어가듯, 뜨거웠던 순간도 결국엔 사라지겠지만, 이 작은 조각의 여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누어진 건 빵의 일부였지만, 사실은 더 많은 것을 공유한 기분이었다.
나는 채망 위에 놓인 휘낭시에를 바라보았다. 베어 문 자국이 남아 있는 그 조그만 조각이,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선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 그리고 그 후.
휘낭시에를 모두 굽고, 뒷정리를 마쳤다. 남아 있던 반죽을 짜내던 짤주머니도, 설탕과 밀가루가 묻었던 조리대도, 오븐 앞에서 뜨거운 열기를 감싸 안았던 장갑도 제자리를 찾았다. 부엌은 다시 말끔해졌지만, 공기 속에는 여전히 버터의 잔향이 가볍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적인 공간으로 향했다. 몸을 기대고, 숨을 조용히 고르며, 온전히 둘만의 온기로 스며들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묵묵히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오븐 속에서 천천히 부풀던 반죽처럼, 대화의 온도도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창문 너머로 기울어가는 오후의 빛이 천천히 흐릿해졌다. 해가 질 무렵, 남아 있던 따스함은 천천히 어두워지는 공기 속에서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온전히 둘에게만 집중했던 이 시간 동안, 우리는 마치 한 번 더 구워진 것처럼 서로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런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그저 서로의 온기가, 그날의 휘낭시에처럼 부드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 여담 1.
낯선 공간에서의 시간은 종종 내 목소리를 작게 만들었다. 분명 편안한 공간인데도, 내가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 사이에 어딘가 가느다란 경계선이 생겼다.
물먹는 하마처럼 하루 종일 물을 마시는 내가, 이상하게도 물 한 잔이 마시고 싶다고 쉽게 말하지 못했다. 주방에 가서 컵을 꺼내는 일조차 어쩐지 망설여졌다. 어색한 기척을 남기는 것 같아서. 그리고 아침, 욕실 거울을 보고서야 머리를 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 욕실에는 샴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말하지 못했다.
작은 문장을 꺼내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말해도 되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괜히 부탁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혹은 별것 아닌 것을 예민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까 봐. 결국, 물도 마시지 않았고, 머리도 감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수십 번쯤 “물 좀 마셔도 될까?”, “혹시 샴푸 있어?”라고 말해 보았지만, 실제로 입술을 떼지는 못했다.
이틀이 지나고서야,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너무 목말랐고, 머리 감고 싶었는데 말을 못 했어.”
밍은 안쓰러운 듯 하지만 귀여운 생물체를 보는 듯 웃었다. 마치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순간 깨달았다. 나 혼자 속으로 곱씹던 고민이,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라는 걸. 필요할 때 필요하다고 말하는 일이 이렇게 쉬운 것이었는데, 나는 혼자서 너무 오래 머뭇거렸다.
밍은 내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주었다. 작은 망설임도 이해하듯, 웃으면서.
그리고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다음번에 오면, 물 마시고 싶다고 먼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 여담 2.
밍은 내가 자주 올 걸 알고 있었다.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집안의 규칙과 공간을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물건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양이들을 돌보는 방법까지.
“이거는 애들 간식인데, 이건 델마씨는 좋아하는데 호섭이는 절대 안먹어.”
나는 밍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보통 손님에게는 이런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가끔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사람이기 때문에 알려주는 것들. 그러니까, 나는 이 집에서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게 이상하게도 기뻤다.
이 집에서 내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공간들이, 이제는 조금 더 익숙해지는 과정 속에 있었다. 다음번에 오면, 밍이 설명해준 대로 자연스럽게 고양이 공간을 정리할 수 있을 것고, 고양이들의 기분을 조금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밍이 알려준 규칙들과 공간에 대한 설명은, 단순한 안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자리 만들기 같았다. 나는 여기에 조금씩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음번에는 자연스럽게 물 한 잔을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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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댓글 하나라도 작성 안하면 등록 버튼이 비활성화 됩니다. 원래 경고창이 떠야했는데 제 지식이 부족해서 구현이 안돼요ㅠㅠ 안내문구 남겨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