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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밍과 함께하는 첫 번째 여행 ✈️, 그 첫째날
᯽ 아침







⚘ 새벽의 기척
새벽 네 시 아홉 분, 어둠이 아직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알람보다 먼저 깬 눈이 천장을 향해 있었다. 창밖에서 희미한 바람 소리가 들렸지만, 실내는 고요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낮고 안정적인 숨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밍이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이불 속에서 몸을 돌리자 미세한 온기가 전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흐릿한 초점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피곤함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 졸린 눈, 하지만 분명한 미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새벽의 정적 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안도. 그러고는 다시 이불 속에서 손을 더듬어 잡았다.
네 시 스무분이 지나서야 새벽이 드디어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정신을 깨웠다. 수증기가 거울을 덮었고, 그 속에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벽 특유의 나른함과 여행을 앞둔 들뜸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부지런히 준비를 하며 식탁 위를 정리했다. 어제 밤 미리 깎아둔 사과를 꺼냈다. 오며 가며 하나씩 집어 먹었다. 사과 특유의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이렇게 사소한 것도 새벽에는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다.
다섯 시 정각,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른 새벽, 도시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어둠 속, 휘발유를 머금은 주차장 공기가 기도를 타고 들어와 폐를 채웠다. 자동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차 안은 아늑한 온기로 차올랐다. 차 안은 마치 우리만의 작은 세계가 된 것 같았다.
⚘ 길 위에서 나눈 이야기
차가 달리는 도로는 너무나 한산했다. 신호등마저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새벽이라는 시간 속에서 마치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전날 밤 미리 손질해 둔 사과와 배를 꺼내 들었다. 첫입을 베어 물자 과즙이 입안에서 가득 퍼졌다. 배는 사과보다 부드러웠고, 그만큼 단맛이 더 깊었다. 나는 배 한 조각을 밍에게 건넸다. 밍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입. 작은 소리를 내며 씹었다. 차 안의 적막한 공기 속에서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도로를 따라갔다. 계획했던 일정에 대해, 제주에서 맛볼 음식에 대해, 그리고 요즘 서로가 고민하는 것들에 대해. 그러다가 문득, 밍이 말을 꺼냈다.
“사람은, 받아왔던 사랑의 방식대로 상대에게 사랑을 준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밍을 알기 전까지 사랑 혹은 마음을 주고받는 방식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받은 사랑은 어떤 것이었고,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주고 있는 걸까. 밍의 말이 내 안의 오래된 감정들을 흔들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밍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너가 이거 언급했던 날 말 하려고 했는데, 이건 카톡이나 톡 보다는 직접 보면서 말 해야될 것 같아서. 지금 말 꺼내.” 밍이 덧붙였다.
그러자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 오해했던 것들. 한참 동안 풀리지 않던 감정의 매듭이 조용히 느슨해지는 듯했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면 엄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사과하고,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야겠다고.
공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 안은 여전히 따뜻했고,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밍은 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제주의 첫 순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짐을 부치고 탑승 수속을 마쳤다. 새벽 공항은 한산할 줄 알았지만, 이른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분주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행객들, 피곤한 얼굴로 대기 중인 항공사 직원들, 이른 시간에도 움직이는 기계 소리들. 대기 줄을 기다리기 전 밍의 도움으로 바이오패스를 등록했다.
“우리 이제 손바닥만 대면 비행기 바로 탈 수 있지.”
앞으로는 긴 줄을 기다릴 필요 없이 손바닥을 대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게되었다. 작은 변화지만, 여행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화장실 앞에서 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탑승 마감 안내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주변의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고, 밍과 나의 이름도 방송에 나와서 조금은 초조해졌다. 하지만 밍은 태연했다. “괜찮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휘저었다. 나는 그런 밍을 보며 웃었다. 제주도를 몇 번이나 다녀온 사람의 태도는 역시 달랐다. 우리는 여유롭게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 후, 나는 금세 잠이 들었다. 창밖에서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지만, 내 눈꺼풀은 감긴 채였다. 기내 방송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머릿속은 무거운 구름처럼 흐릿했다. 제주도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 위에서 부족했던 새벽잠을 채웠다. 멀어지는 도시와 가까워지는 바다, 나는 그 모든 변화를 꿈속에서 지나치듯 흘려보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우리는 다시 밝은 빛 속으로 나왔다. 도착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구.
“All Is Well.”
초록빛 풍경으로 가득 찬 광고 우측 하단에 쓰여있던 그 문구를 보자마자 어쩐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밍이 문구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세 친구’라는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같이 보자.” 밍이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한마디가, 단순한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들을 함께 쌓아가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또, 세븐일레븐과 CU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밍의 말에, 앞으로 편의점을 볼 때마다 밍이 떠오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렌트카는 흰색이었다. 밍은 운전석에 앉아 이것저것 눌러보며 기능을 확인했다. 익숙하지 않은 차라서 살짝 낯설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밍이 이것저것 만지는 동안, 나는 렌트카 기스난 부분 구석구석 영상과 사진을 찍어놓았다. 고개를 숙이니 내 그림자가 굉장히 또렷하게 보였다. 맑고 높은 하늘, 부드럽게 부는 바람. 모든 것이 청량했다.
우리는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첫째 날 우리의 플레이리스트는 잔잔한 찬송가 피아노와 첼로 곡이었다. 맑고 서정적인 선율이 차 안을 감쌌다. 음악과 함께, 제주도의 공기가 서서히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 카페, 진정성 (종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차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차 안의 따뜻한 공기가 단숨에 빠져나갔다. 제주도의 바닷바람이 차가운 손길로 얼굴을 스쳤다. 새벽부터 움직인 몸은 피곤할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다는 저 멀리서 유유히 출렁이고 있었다. 햇살은 물결 위에 부서지며 부드럽게 반짝였다. 바람 속에는 짠 내음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절제된 공간이었다. 무채색 벽,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투박한 듯한 직선 구조의 가구들. 곡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 투박함이 오히려 세련되게 다가왔다. 마치 여백이 많은 그림처럼, 있는 그대로의 공간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커다란 통창문을 통해 바다가 그대로 들어왔다.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이며,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부드럽게 흩트렸다.
주문을 하면서 고민하다가, 쑥흑임자 마들렌을 골랐다. 쑥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고른 메뉴였는데, 마들렌을 받아들고 밍이 말했다.
“근데 나, 흑임자는 별로 안 좋아해.”
나는 순간 멈칫했다. 밍은 쑥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흑임자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밍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그래도 맛있다며 먹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겠지.
창가 자리로 향했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는 바다가 가장 잘 보였다.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다는 한없이 가까이 있었지만 동시에 멀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그 너머는 또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는 거리감.
밍은 작은 포크로 마들렌을 균등하게 쪼개 그 중 한 조각을 나에게 내밀었다.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흑임자의 고소한 향이 먼저 퍼졌고, 곧이어 쑥크림의 달콤 쌉싸름한 향이 따라왔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맛. 밍도 조용히 마들렌을 먹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밍은 혼자 제주도에 자주 왔었던 사람이다. 이곳에서 밍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기분으로 바다를 바라보았을까. 이 카페에 홀로 앉아,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나는 그때의 밍을 상상해보려 했다.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어쩌면 수많은 감정을 곱씹으며. 이 바다를 몇 번이고 바라보면서, 이 공간에서 들리는 조용한 음악과 커피 향 속에서, 밍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 시간이 궁금했다. 그 순간의 밍이, 이곳에서 어떤 마음을 안고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바다는 아마 밍에게 위안이 되는 장소이지 않았을까 싶다. 바다는 그런 곳이었다. 머릿속이 가득 차 있을 때, 그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곳. 감정을 쏟아내지 않아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저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주는 곳.
⚘ 이호테우 해변, 바람 속에서
이호테우 해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마치 바다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주차되어있는 자동차들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밍이 뒷좌석에서 코트를 꺼내 내 어깨 위에 살포시 걸쳐주었다. “입어,” 말 없이 그런 마음을 건넨다는 듯이. 코트의 무게가 어깨를 덮었다.
내 발목까지 내려오는 코트는 마치 조선시대 두루마기 같았고, 나는 웃음이 나왔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장난스럽게 외쳐보다가 바람이 너무 세서 입을 꼭 다물었다. 그렇게 코트 안에서 나를 숨긴 채,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공기는 차가웠고, 파도는 바람을 타고 거세게 부서졌다. 하늘에는 연한 회색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아래로 물결이 일렁였다. 나는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졌다.
나는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낄 때면, 언제나 ‘예쁘게’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가장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밍 앞에서는 그런 신경을 덜 써도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강박이 사라졌다.
밍은 내가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이 구겨지고, 얼굴이 바람에 붉어져도 여전히 나를 좋아할 것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자유롭게 있을 수 있었다. 코트에 푹 싸여 몸을 웅크리고 있는 지금도, 내가 굳이 단정하지 않아도, 여전히 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건 단순한 편안함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었다.
저 멀리 건너편 부두에는 빨간 말과 흰 말 조형물이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그 선명한 색감이 도드라져 보였다. 밍과 나는 바닷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부두의 끝까지, 바람이 우리를 밀어내려 해도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바람이 강하게 부딪칠수록 더 단단히 땅을 밟았다. 발밑에서 자잘한 조약돌들이 바람에 밀려 작은 소리를 냈다. 파도는 가까운 곳에서 낮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걸었을까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 하늘이 더욱 넓어 보였다. 비행기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철의 덩어리가 하늘에서 부드럽게 내려앉는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몇 대의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봤다. 어쩐지 멍하니 빠져들었다. 비행기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이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주 어린 시절,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를 때마다 손을 뻗었던 기억. 그때는 내가 저곳에 타고 있을 날이 올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조각상들을 지나쳤다. 돌로 만들어진 독특한 조형물들. 포말, 산호, 해초, 파도. 모두 바다를 표현한 작품들이었다. 바닷바람에 닳고 닳았을 표면이, 오래도록 이곳에 서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어 조각상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밍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바람이 조금 잦아들고 있었다.
᯽ 점심
⚘ 맛에 대한 진심, 숙성도 본점



점심으로 선택한 곳은 숙성도 본점. 정용진 회장의 맛집 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단순한 화제성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보니 그 명성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밍은 이미 다른 지점에서 먹어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밍은 그런 사람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본점에서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맛에 대한 진심을 가진 사람. 같은 메뉴라도 본점에서 먹는 건 또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런 디테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나는 그런 밍이 좋다.
식탁 위에는 두툼한 돼지고기가 올려졌다. 처음엔 평범한 삼겹살과 크게 다를 바 없겠지 싶었다. 하지만 첫입을 베어 무는 순간, 부드러우면서도 촉촉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돼지고기의 고소한 풍미와 적당한 기름기가 씹을수록 배어나왔다. 스태프들이 중간중간 고기를 뒤집어주었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구워낸 고기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숙성된 고기를 즐기는 방식도 다양했다. 명란젓을 올려 짭조름한 감칠맛을 더하거나, 갈치젓을 살짝 곁들여 깊은 바다 내음을 입안에 감돌게 했다. 나물과 묵은지를 함께 곁들이면 씹는 내내 조화로운 균형이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손에 익은 맛이었지만, 또 새로웠다. 그리고 밥에 갈치젓을 비벼먹으면 그렇게 맛있다는 것을 밍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밍은 자꾸 내 앞으로 고기를 가져다 놓았다. 한 점, 두 점, 어느새 내 쪽 불판 위에는 작은 산이 쌓였다. 나는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고기를 밍 쪽으로 다시 옮겨놓았다. 밍은 내가 모르게 또 내 앞에 올려놓고, 나는 다시 밍 앞에 밀어놓고. 우리는 서로에게 더 양보해주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모습이 익숙하고, 또 웃겼다. 우리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 엄마를 위한 선물, 덕인당
든든한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밍이 갑자기 물었다.
“류제야, 너네 어머니 떡 좋아하셔?”
나는 머릿속으로 엄마의 식성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싫어하는 것도 없고, 편식하는 법도 없다. 그래서 “음, 다 잘 드셔.”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덕인당으로 향했다. 제주에서는 유명한 떡집이었다. 수요미식회에도 나왔던 곳이라고 한다. 밍은 혼자 제주도에 자주 오는데, 올 때마다 어머니께 쑥빵 한 박스를 선물로 배송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놀랐다. 제주도에 올 때마다 늘 그렇게 챙겼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밍은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
이번에는 우리 엄마에게도 선물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나는 그걸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밍의 어머니 선물은 내가 결제하고, 우리 엄마 선물은 밍이 결제하자고 했다. 서로가 서로의 어머니께 선물하는 것.
당연히 밍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밍도 끝까지 버티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하겠다고 했다. 작은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덕인당 사장님께서 중재해 주셨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우리는 사장님의 중립적인 해결 방식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어머니에게 작은 효도를 했다.
⚘ 서로를 위한 마음, 그리고 쑥빵 한 조각
사장님은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그 눈빛에는 ‘참 보기 좋은 사람들이네’라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서비스로 쑥빵을 하나씩 건네받았다. 그리고 보리빵도 하나 더.
손에 들고 갓 나온 쑥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은 포슬포슬했고, 안에는 팥앙금이 부드럽게 채워져 있었다. 달콤하지만 무겁지 않았다. 씹을수록 은은한 쑥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속이 불편하지 않은 담백한 맛.
보리빵은 이튿날 아침으로 먹었다. 기름과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았다. 부드럽고 가벼운 텍스처. 한 입 먹는 순간, 몸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 식사로 딱 좋았다. 소화도 잘 될 것 같은, 그런 따뜻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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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순간이 참 좋았다.
우리는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서로의 가족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서로에게 더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이 우스울 정도로 닮아 있었고, 그게 또 고마웠다.
좋은 맛은 혀끝에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먹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맛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 그 속에서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 오후
⚘ 예정에 없던 바다, 동복해수욕장
우리는 원래 이곳에 오려던 게 아니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길이 이끄는 대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차창 너머로 바다가 어렴풋이 보였다. 처음에는 희미한 실루엣이었다. 빛을 머금은 바다가, 도로 너머로 반짝이며 고개를 내밀었다. 바다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달리던 길에서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는 순간. 푸른빛과 청록빛이 섞인 수면이 태양 아래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너무 예뻤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바꿨다. 그렇게 동복해수욕장에 발을 디뎠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색감이 짙었고, 바다는 그 아래서 고요하게 반짝였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춥지 않았다. 오히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며 온몸을 감쌌다. 뜨거운 공기와 차가운 바람이 섞여, 피부 위로 묘한 감각을 남겼다.
나는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걸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제멋대로 흩날렸다. 엉키고 설켜, 얼굴을 덮기도 하고,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손으로 몇 번 쓸어넘겼지만 소용없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마치 바람이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밍과 함께 있으면 이런 순간들이 단순히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가 엉망이 되어도, 얼굴이 바람에 붉어져도, 그런 건 사소한 문제가 된다. 함께 있으면 어떤 순간이든 가볍고, 즐겁다. 굳이 찡그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바람 속에서 마냥 웃었다.
⚘ 낙원의 밤 촬영지였대
길을 따라 걷다가 낙원의 밤 촬영지였던 식당을 지나쳤다. 영화 속 한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걸 알게 되니, 길 위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나는 영화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 아니지만, 밍과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밍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도, 일상적인 순간 속에서도, 영화와 연결되는 지점들을 발견해내곤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한 편의 영화가 머릿속에 자리 잡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렇게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둘씩 쌓인다. 제주에 와서 알게 된 영화도 있었다. ‘세 친구’, 그리고 ‘낙원의 밤’. 둘 다 제주에 도착한 후 알려준 영화였다. 아마 이곳에서 본 풍경이, 나중에 영화를 볼 때 다시 떠오르겠지.
걷고 또 걸었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바닷가 바위 쪽으로 향했다. 바위 틈 사이로 작은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고여 있었다. 바닷물이 스며들어 만들어진 작은 연못 같은 공간들. 밍이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이며 웅덩이 속을 들여다봤다.
⚘ 고동 유치원
밍은 웅덩이 속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작은 물고기라도 있을까 싶어서.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라게가 지나갔다. 그리고 또 한참을 들여다보던 밍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고동이다.”
나는 웅덩이를 다시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바위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집중해서 보니 조그마한 고동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물속에서 조용히 꿈틀거리는 작은 생명들. 밍은 웅덩이마다 따로 떨어져 있는 고동들을 하나씩 모아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손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올려, 하나의 웅덩이로 옮겼다.
나는 옆에서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도 함께 돕기로 했다. 하나씩 조심스럽게 줍고, 다시 놓아주었다. 웅덩이 물이 차가울 줄 알았는데, 햇빛을 받아 따뜻했다. 손을 담그고 있어도 시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스치며 전해지는 물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손가락을 담그고 고동을 집어 올릴 때마다, 작은 생명들이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20여 분 정도 물웅덩이 속을 정리했다.
어느새 작은 고동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밍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건 고동 초등학교라고 하자”
“그것보다 고동 유치원이 더 귀엽지 않아? 얘네한텐?”
“그래 그러자, 고동 유치원.”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니 정말 그렇게 보였다. 물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생명들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뒤집어진 친구들은 다시 똑바로 세워주었다.
유치하게 논 것 같지만, 마음만큼은 순수하고 따뜻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너무 즐거웠다. 밍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된다.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치고, 작은 것에도 몰입하고, 그런 순간들이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될 어떤 순간이 된다.
⚘ 풍경 좋은 길, 그리고 영화 같은 순간
숙소 체크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고, 제주도의 오후는 여전히 빛으로 가득했다. 내비게이션이 두 가지 길을 제안했다. 평범한, 빠른 길. 그리고 17km가 추가되고 5분이 더 걸리는 ‘풍경 좋은 길’. 밍은 바다가 보이는 길을 택했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오래 붙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차가 길을 따라 나아갔다. 창밖으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먼 곳에서는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아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는 얕은 바다의 청록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바다는 오후의 태양을 품고 반짝였다. 햇빛이 수면에 닿을 때마다 작은 파도들이 금빛으로 일렁였다. 도로 옆으로 낮은 돌담들이 이어졌고, 간간이 러닝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디를 봐도 제주였다. 이곳만이 가질 수 있는 색과 결이 도로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밍이 운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어 밍의 옆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바다와 하늘이 배경이 되어, 그 위로 운전을 하는 밍이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눈에 담았다.
운전하는 밍을 보고 있으면,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밍은 언제나 밝고 활기찬 사람이지만, 운전을 할 땐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 된다. 핸들을 쥔 손끝이 안정적이었고, 길을 바라보는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깥 풍경이 흘러가고, 빛이 움직이고, 바람이 차창 너머에서 밀려들었다. 하지만 밍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필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나는 조수석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가 없는 나는 늘 엄마차의 조수석에만 앉아 있었고,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오래 바라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밍이 운전하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밍은 내 눈에 뭐가 담겨졌는지 모를 것이다. 바다가 흐르고, 바람이 스치고, 빛이 반짝이는 오후의 한 장면을.
᯽ 늦은 오후, 저녁, 밤, 그 이후
⚘ 신기한 우연, 그리고 9층의 방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받은 키카드를 보니, 객실 번호가 눈에 익었다. 익숙한 조합. 이상하리만치, 내가 사는 집의 호수와 정확히 같았다. 밍과 나는 키카드를 번갈아 보며 “오오– 신기하다!” 하고 동시에 소리쳤다. 우연이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의 시작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올라갔다. 9층. 너무 익숙한 층이었다. 문이 열리고 복도를 따라 걸으며, 마치 다른 차원의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왔지만, 어딘가 낯익은 감각이 스며들었다. 새로운 공간이지만 왠지 편안한 느낌.
방에 들어서자 우리는 짐을 풀었다. 밍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꼼꼼하고 단정하게. 여행 가방을 열자마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옷은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밍은 처음에 자기 자신을 P(즉흥형)이라고 소개했지만, 이건 절대 J(계획형)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점을 지적하려다 그냥 조용히 보기로 했다. 가끔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성향이 살짝 엿보이는 순간이 재미있었다.
⚘ 뷰 좋은 방, 휘뚜루 마뚜루 뷰
짐을 얼추 정리하고 우리는 베란다로 나갔다. 바깥 공기가 살짝 차가웠지만, 하늘이 맑아 기분이 상쾌했다. 눈을 들자 저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주 저멀리 오션뷰. 바다는 멀리서 은빛을 띠며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초원..이라고 하기엔 좀 작지만 아무튼 말 몇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어? 유채꽃도 있네.” 나는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원 구석에 유채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유채꽃밭이라고 하기엔 소박한 크기였지만, 노란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점을 찍어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멀리 눈길을 돌리자, 폐가가 하나 보였다.
“저멀리 한라산뷰, 저멀리 오션뷰, 초원뷰, 유채꽃뷰… 그리고 폐가뷰?”
우리는 호텔 전망을 우리 마음대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마치 부동산 광고라도 하는 것처럼. 풍경을 마주하는 방식도 이렇게 만들 수 있다. 있는 그대로만 보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재미있게, 조금 더 특별하게. 밍과 함께라면 그렇게, 사소한 것에도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 작은 편집숍에서 찾은 작은 기념품들
숙소 주변을 걷다 작은 편집숍을 발견했다. 유리창 너머로 퍼지는 조명이 따뜻했다. 내부의 조명은 창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와 길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열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공기에는 나무와 패브릭이 섞인 은은한 향이 떠다녔다. 마치 긴 여행 끝에 도착한 조용한 쉼터 같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여기저기 놓인 물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선반 위에는 가죽으로 만든 작은 카드지갑과 심플한 디자인의 에코백이 있었고, 창가 쪽에는 머그컵과 손으로 짠 듯한 천 가방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벽에는 제주 풍경을 담은 장식품 붙어 있었는데, 색감이 묘하게 바래서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선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밍도 내 옆에서 하나를 골랐다. 우리는 나란히 거울 앞에 서서 선글라스를 써 보았다. 거울 속의 우리는 어딘가 낯설고도 익숙했다.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너무 커 보이지 않아?”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밍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러게, 영화 속 캐릭터 같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우리는 몇 번 더 선글라스를 바꿔 써 보다가 결국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밍이 손수건 코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옆으로 다가갔다. 초록빛 산이 수놓아진 손수건 한 장, 분홍빛 꽃이 수놓아진 손수건 한 장. 밍과 나는 말없이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초록색과 분홍색. 우리의 취향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손수건은 물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언젠가 이 손수건을 사용할 때면, 지금 이 순간이 떠오르겠지. 제주도의 따뜻한 오후, 유리창으로 스며들던 햇빛, 조용한 음악, 그리고 함께 거울을 바라보며 웃던 기억들까지.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손수건이 아니라, 시간을 접어 넣은 작은 조각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런 기념품이 좋다. 언젠가 무심코 가방을 열었을 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을 때, 그 안에서 오늘의 제주가 살짝 펼쳐질 것 같아서.
나는 밍을 바라보았다. 밍은 이런 공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떤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분위기. 조명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가만히 무언가를 고르고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어울리는 사람.
⚘ 산책, 그리고 지나가는 풍경들
숙소 주변은 걷기에 좋았다. 사람도 많지 않고, 차도 그리 많지 않았다. 제주도의 공기는 한층 가벼웠고, 하늘은 서서히 저녁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목적 없이 걷는 시간이 좋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사소한 풍경 하나하나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유채꽃밭이 곳곳에 보였다. 노란 물결이 바람에 일렁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햇빛을 반사했다. 그 풍경 속으로 승마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천천히 지나갔다. 고요하게 흐르는 장면들. 제주에서는 이런 것들이 당연한 일상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길을 따라 걸으며, 아주 오래된 간판들을 보았다. 세월이 그대로 묻어 있는 글씨체.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슨 틀, 하지만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가게들. 마치 시간이 오래전 어느 순간에서 멈춘 것처럼 보였다.
높은 기둥이 세워진 오래된 목욕탕도 보였다. 희미한 증기가 떠오르는 듯한 착각. 그 앞에는 한 송이만 남아버린 동백꽃이 서 있었다. 주변에는 이미 꽃잎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나무에는 단 하나의 꽃만이 남아 마지막 계절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또 한참 걷다보니 백목련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겨울과 봄이 만나는 순간처럼, 이미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나무였다. 시간이 교차하는 장소, 이 호텔 주변이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천천히, 그리고 가볍게. 바람이 불 때마다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그 순간이 좋았다. 걷는다는 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그 길을 온전히 느끼는 일이었다.
밍과 함께하는 이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여행이란, 이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밍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랐다.
⚘ 밥 한 끼 속의 발견들
제주도의 밤은 조용했다. 가로등이 도로 위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고, 바다는 낮 동안 반짝이던 빛을 모두 거두어들인 채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횟집에 전화를 걸었다.
“광어 한 판이요.”
그렇게 간단한 주문 한 마디로 오늘 저녁이 정해졌다. 밍과 나는 숙소에서 한 숨 돌리다가, 다시 식당에 들러 포장된 회를 받아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각자 한손씩 맡은 포장봉투 사이로 회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나왔다. 신선한 바다의 향과 함께, 이 한 끼가 유난히 더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테이블을 정리했다. 밍은 봉투를 열어 용기를 꺼내고, 나는 초고추장을 작은 종지에 따랐다. 호텔 테이블이 작아서, 우리는 우리의 트렁크를 간이 테이블로 쓰기로 했다. 포장된 광어회를 조심스럽게 펼치자, 투명한 생선살이 한 겹 한 겹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밍은 테이블을 세팅하면서, 마치 작은 의식을 치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밍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회 한 점을 집어 초고추장에 살짝 찍었다. 젓가락을 타고 올라온 살점이 붉은 소스에 살짝 물들었다. 입안에 넣는 순간, 부드럽게 퍼지는 식감. 담백하면서도 씹을수록 감칠맛이 배어 나왔다. 바다의 풍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밍이 생선을 좋아하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하는지는 이날 처음 알았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밍을 바라보았다. 밍은 회를 한 점 더 집으면서 나를 힐끗 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진짜 맛있어.”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생한 미래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언젠가 밍이 우리 집에 놀러 와 냉장고를 열었을 때, 거기에는 언제나 손질된 냉동 생선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어묵과 배 외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생선살들이 늘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쿠팡으로 밍이 좋아할만한 생선들을 담았다.
숙소 테이블 위에는 광어회가 반쯤 남아 있었다. 초고추장이 담긴 종지는 한쪽으로 밀려 있었고, 회를 집던 젓가락은 느슨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배는 이미 충분히 불렀지만, 우리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은 멈췄지만,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식탁 위에 남겨진 음식들이 우리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밍을 바라보았다. 밍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표정이 변함없었다. 차분하면서도 따뜻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왜 밍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걸까.
밍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가 과하지 않지만, 결코 가볍지도 않다.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지금껏 품고 있던 고민들이 한 겹씩 풀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나 조언 때문이 아니다. 밍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준다. 다 듣고 난 후에야,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나를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마치 안개가 거치듯, 짙은 연기가 스르르 흩어지듯. 고민이라는 게 본래 그 자체보다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법인데, 밍과 이야기하면 그 무게가 어느새 가벼워졌다. 밍이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아닌데, 말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트였다. 마치 물에 떠 있는 부표처럼, 밍의 말은 나를 가라앉지 않게 했다.
하지만, 밍과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에는 다시 고민들이 스멀스멀 모여들 때도 있다. 걱정거리들은 마치 밤의 어둠처럼 조용히 차오르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익숙한 불안들이 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럴 때면, 나는 밍이 해줬던 말을 떠올린다.
밍이 해줬던 말들이 조각조각 떠오르면서, 마음이 다시 차분해진다. 마치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온기가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밍은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스스로 해결할 힘이 생기는 기분이 든다. 마치 등 뒤에서 조용히 지지해주는 것처럼. 그것이 밍의 힘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밍이 내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여행 첫째 날의 밤, 그녀의 배려 덕에 나는 깊고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었다.
고마워 미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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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댓글 하나라도 작성 안하면 등록 버튼이 비활성화 됩니다. 원래 경고창이 떠야했는데 제 지식이 부족해서 구현이 안돼요ㅠㅠ 안내문구 남겨드립니다.
고마워 류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