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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롯이 둘만 존재했던 하루
᯽ 느릿한 아침의 결
잠에서 깨어난 건 온기 때문이었다. 아주 미묘하고, 부드럽고, 조용한 것. 숨소리가 가만히 가슴 위에서 출렁였다. 워치를 봤다.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늦어 있었다. 예상대로 사자쿤은 기절해 있었다. 그리고 내 왼쪽 어깨엔, 밍이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느리게, 귓가에 바람처럼 가벼운 숨을 놓으며.
밤늦도록 이어진 대화들이 떠올랐다. 언어로 주고받은 것들과, 그보다 더 많은 침묵 속에서 나눈 것들. 한 문장씩 던지다 멈추고,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눈빛이 언어가 되고, 체온이 이야기가 되고, 손끝이 감정을 전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했다. 말을 줄여도 괜찮은 관계 속에서.
새벽이 오고,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쿠팡맨이 다녀갔나보다. 벨소리도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놓인 박스. 문을 열었을 때 차가운 새벽 공기가 스며들었다.
보이차를 우렸다. 찻잎이 물속에서 천천히 풀어졌다. 김이 천천히 피어오르고, 그 위로 빛이 얹혔다. 찻잔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스며들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이 바람에 아주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공기가 부드럽게 흘렀다.
단호박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밍이 작은 숟가락으로 식혜를 떴다. 혀끝에 닿는 단맛을 조심스럽게 음미하는 얼굴이었다. 냠,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입술을 오므렸다. 한 모금 삼키고도 여운이 남는지 다시 한 번 천천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맛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밍은 아무튼 이상하게 귀여운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그런 밍과 함께여서 더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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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과 오후
⸙ 국물이 끓는 냄비에서 작은 거품이 피어올랐다. 김이 부드럽게 퍼졌다가 천천히 흩어졌다. 낯선 주방이었지만, 재료들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낸 향은 익숙했다. 각종 육수재료의 감칠맛과 채소에서 우러난 단맛이 함께 녹아 있었다. 국자를 들어 국물 한 숟가락을 떴다. 묵직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따뜻한 국물이 혀끝을 감쌌다. 나처럼 혼자 사는 친구에게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조미료 없이, 재료 본연의 맛을 담아낸 국물이 몸속 깊이 퍼지는 한 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골 냄비를 열었다. 푹 익은 채소와 고기가 국물에 깊숙이 잠겨 있었다. 국자로 전골을 한 번 저었다. 깊게 우러난 육수가 버섯과 고기 사이를 타고 흘렀다. 전골만으로도 충분한 식사였다. 친구도 국자를 들었다. 국물 한 숟가락을 떠서 조심스럽게 불었다. 그 동작이 무척 천천히 느껴졌다. 우리는 오래 말하지 않았지만, 한입씩 음식을 떠먹는 시간이 충분한 대화 같았다.
무우지를 한 점 집었다. 살짝 단맛이 감도는, 적당히 새콤한 무 조각이 전골의 뜨거운 국물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입안에서 사각거리며 씹히는 촉감이 좋았다. 따뜻한 것들이 몸속을 타고 흐르는 감각도.
식사가 끝났다. 창밖에는 여전히 한낮이 걸려 있었다. 테이블을 가볍게 정리한 후, 디저트를 꺼냈다. 그녀가 직접 구운 휘낭시에, 위에는 포슬포슬한 녹차카스테라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들어 앙 배어 물었다. 고소한 버터의 풍미와 촉촉한 식감이 입안에서 천천히 퍼졌다. 친구는 그걸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맛 괜찮아?”
나는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어.”
그런데 친구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 괜찮아?”
나는 웃으며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정말로 맛있어.”
친구가 정성스레 만들어준 허니라떼도 한 잔 나왔다. 달콤한 꿀 향이 우유 거품 위로 부드럽게 퍼졌다.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단맛이 혀끝에 스며들었다. 친구는 내 반응을 살피며 또다시 물을 것만 같았다. “괜찮아?” 나는 묻기도 전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에서는 오후의 햇살이 천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우리는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이 눈빛과 기척과 서로 맞잡은 손에서 오갔다.
다행이다, 이 사람이 내 옆에 있어서.
그 말이 꼭 목소리로 나오지 않아도, 친구는 아마 알고 있을 거다. 허니라떼를 한 모금 마시는 그 순간에도, 휘낭시에를 천천히 음미하는 그 순간에도. 이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과 대화, 그리고 편안한 침묵이 그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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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시 이어지는 오후
⸙ 팝콘 봉투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돌아가는 모터 소리 위로 ‘톡, 톡’ 하고 하나둘씩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2분 30초가 지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덜 터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친구도 살짝 고개를 갸웃하더니, “1분만 더 돌려볼까?” 하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1분이 추가된 전자레인지 안에서 팝콘은 다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서히, 그 익숙한 향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들어왔다. 단내와 함께 희미하게 탄내가 섞여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엇, 이거 타는 것 같은데?” 나는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친구는 내 말을 듣자마자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다. 봉투를 뜯는 순간, 예상했던 그 장면이 펼쳐졌다.
팝콘은 바삭하게 구워졌다기보다는, 솔직히 말해 약간 탔다. 봉투 안에서 퍼지는 갈색빛, 그리고 너무 짙어진 캐러멜 향. 친구와 나는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덜 탄 거 골라서 먹으면 되지 않을까?” 친구가 봉투를 뒤적이며 말했다. 나도 따라 손을 넣었다.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고 덜 탄 것들을 골라냈다. 바삭하지만 지나치게 쌉싸름한 맛이 났다. 내가 고른 것보다 밍이 골라준 팝콘이 좀 더 맛있었다.
“이거 나중에 분명히 추억 된다.”
“그치, 몇 년 뒤에는 ‘그때 우리 처음으로 같이 돌린 팝콘 태웠잖아!’ 하면서 또 웃겠지.”
벌써부터 우리는 웃고 있었다. 순간의 작은 실패가 곧 소소한 기억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망한 팝콘을 뒤적이며 킥킥대는 사이, 새로운 팝콘이 완성되었다. 이번엔 적당했다. 봉투를 열자 갓 튀긴 팝콘에서 폭신한 단내가 퍼졌다. 우리는 그것을 품에 안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오랫동안 좋아했던 영화를 틀었다.
중경삼림, 흐르는 빛과 멈춰진 얼굴들
화면 속 네온사인은 흔들렸다. 푸른빛, 붉은빛, 노란빛이 감정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왕가위의 영화는 그렇게 빛으로 말하는 영화다. 캐릭터들의 얼굴을 감싸는 색이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몽환적으로 번진다.
내 친구는 왕페이를 오랫동안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해?” 나는 영화를 보며 물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해. 예전처럼.” 그 대답이 왠지 마음을 찌르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그 마음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화면 속 왕페이가 피식 웃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단발머리, 투명한 표정. 친구가 화면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친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변함없이 좋아하는 그 마음이 좋았다.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삶의 결이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영화는 두 개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는 오래된 필름처럼 빛이 바래 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빛이 꺼져 가는 관계와 새롭게 시작되는 감정이 교차했다. 우리는 팝콘을 한 개씩 집어 입에 넣으며, 그 장면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홍콩, 그리고 중경삼림의 흔적들
영화를 본 후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화면이 꺼진 TV에는 희미한 잔상이 남아 있었다. 팝콘을 담은 볼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친구는 중경삼림의 촬영지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 혼자 있던 시간 속에서 자신을 위로해 주었던 영화. 그 영화의 풍경들. 익숙한 장면을 실제로 마주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그 감정을 친구가 직접 마주하길 바랐다.
나는 그 상상을 따라가 보았다. 붉은 네온사인이 새어 나오는 홍콩의 좁은 골목, 그 속에서 친구가 카메라를 들고 조용히 빛을 담는 모습. 친구가 마음속에 담고 있던 감정을, 그 거리에서 새롭게 꺼내어 보는 순간.
어쩌면 친구에게 홍콩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닐지도 몰랐다.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했던 풍경이 현실이 되는 순간, 친구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위로했던 감정과 지금의 자신이 맞닿는 곳. 나는 그 시간을 함께 지켜보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팝콘을 한 줌 집어 들었다. 몇 개 남지 않은 팝콘, 부드러운 단맛과 바삭한 식감. 친구가 조용히 팝콘 볼을 정리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고, 팝콘을 먹고, 다음 여행을 떠올렸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작은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 소중한 것들을 대하는 태도
오래된 책이 있었다. 정확히는,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은 책. 손때가 묻어야 할 세월을 지나왔음에도, 페이지 하나 구겨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책이었다. 그것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책이 아니라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 온 사람의 마음을 먼저 떠올렸다.
“이거 보여줄게.”
친구가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었다. 첫 번째 소장품이었다. 그녀는 모 드라마의 특별 동화 시리즈 다섯 권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표지에는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선명한 색감이 남아 있었고, 비닐 포장은 한 번도 뜯긴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손으로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하나 뜯을까?”
밍이 말했다. 책을 구매한 지 5년 만이었다. 나는 살짝 놀랐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포장을 뜯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개봉할 결심을 했다는 사실도.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순간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포장지를 벗겼다. 바스락, 얇은 비닐이 공기 속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한 표지가 드러났다. 책은 마치 지금 막 인쇄소에서 나온 듯 반짝였다. 손끝으로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비로소 펼쳐진 페이지.
나는 포장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것을 곱게 접어 밍밍박스에 넣었다. 밍밍박스에는 거창한 보물 같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첫 번째로 개봉한 책의 내용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묶여 있는 강아지, 밝은 표정 아래 감춰진 깊은 감정들. 한 줄 한 줄을 넘길 때마다, 무언가가 마음을 건드렸다. 어쩌면 그 드라마도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겠지. 그리고 그 드라마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그녀도.
나는 그 감정을 아는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이 좋았다.
᯽ 오래된 것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온 마음
두 번째 소장품은 한 권의 일러스트집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책을 넘길 때마다 잠시 손이 멈출 정도였다.
“이 작가, 내가 진짜 좋아해.”
그녀가 말했다. 한국의 일러스트 작가. 지금처럼 디지털 작업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낸 작품들. 책을 펼치자, 페이지마다 섬세한 선들이 가득했다.
그 당시의 기술을 고려하면, 이건 말도 안 되게 정교했다. 색의 배치, 그림의 밀도, 손끝에서 탄생한 감각적인 터치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를 더 감탄하게 만든 것은, 책 그 자체였다. 오래된 책이었지만, 표지는 깨끗했고, 페이지 모서리는 구겨지지 않았다. 책등은 갈라지지 않았고, 색이 바래지지도 않았다. 마치 시간이 이 책을 비켜 간 것처럼.
“이거, 정말 상태가 너무 좋아.”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소중히 다루어 온 결과였다.
그녀가 책을 넘기는 손길을 보았다. 마치 아주 얇은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손끝의 태도를 통해 그녀가 무언가를 얼마나 깊이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들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소중히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껴왔기 때문에, 이 책은 몇십 년이 지나도 이렇게 깨끗할 수 있었겠지. 나는 그 마음이 참 좋았다.
᯽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낸다는 것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곧 그 사람을 드러낸다.
나는 친구의 소장품들을 보면서 그것을 알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오래된 종이의 냄새를 맡으면서, 그 책들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지켜온 그녀의 마음을 떠올렸다.
그녀가 왕페이를 좋아하는 것도, 드라마의 동화책을 5년간 개봉하지 않은 것도, 일러스트집을 조심스럽게 보관해 온 것도. 그것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소중히 다루는 태도. 그것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것.
나는 그 태도를 존경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친구라는 것이 좋았다.
᯽ 다이소 데이트
밍의 옷을 빌려 입었다. 그녀의 옷장을 열면 똑같은 옷이 서너 벌씩 나란히 걸려 있다. 같은 색감, 같은 핏. 그녀는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한 번 마음에 든 것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커플룩이 되었다. 거울을 보니 옷차림이 똑같았다. 나는 팔을 한 번 들어 올려보았다. 마치 짝을 맞춘 듯한 느낌. 별다른 의도 없이도 이렇게 맞춰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밍네 엘리베이터는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은 곳이다. 조명이 적당하고, 거울도 깨끗하다. 하지만 지하주차장에서 그녀의 집까지 거리는 짧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속도가 빨라서, 사진을 찍을 틈이 없다. 나는 갈 때마다 아쉽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9층이라, 중간에 사람이 타지 않으면 얼마든지 셀카를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매번 ‘찍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문이 닫히고 나면 이미 늦어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나란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셀카를 찍을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나는 살짝 아쉬운 기분을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우산을 펼쳤지만, 손에 힘을 꽉 줘야만 했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우산이 흔들렸다. 우산이 뒤집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우리는 조용히 걸었다. 어쩌면 그냥 비를 맞고 걸었다면 더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펼친 우산을 접기에는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있었다.
다이소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장바구니를 들고 다회용 용기를 찾았다.
밍은 환경 보호 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일회용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휘낭시에를 만들어 줄 때는 어쩔 수 없이 일회용기에 담아줬다.
“이걸로 할까?” 밍이 다회용 용기를 들어 올렸다.
나는 손에 쥐고 살펴보았다. 크기가 적당했고, 뚜껑이 단단했다.
“이제 이걸로 휘낭시에 담으면 되겠다.”
이렇게 작은 일도 나와 함께 결정하는 것이 좋았다. 물건 하나를 바꾸는 일조차도 혼자 결정하지 않고, 함께 이야기하고 고르는 것. 그런 순간이 쌓일수록, 우리는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다회용 용기를 장바구니에 넣고, 우리는 욕실러그 코너로 향했다. 핑크색 러그를 고르며 밍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옥신각신의 순간들도 좋았다.
그리고 젤리 코너에서 우리는 멈췄다. 바나나우유맛과 딸기우유맛. 결국 둘 다 샀다. 젤리 봉지를 손에 들고 가게를 나설 때,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하나씩 먹으며 어떤 맛이 더 좋은지 이야기하게 될 것을.
둘이 함께 찍는 거울 셀카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경황이 없었다. 그리고 거울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순간적으로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내가 서성이는 것을 밍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볼 수 있지 않을까.
밍은 이걸 모른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의 아쉬움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니까. 다음에 또 이런 순간이 오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겠지.
다이소에서 사 온 물건들이 담긴 장바구니가 우리의 발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 늦은 저녁식사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하루의 끝자락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이소에서 사온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러그를 바닥에 펼치고, 다회용 용기를 싱크대 한쪽에 놓았다. 젤리는 냉장고 문칸으로 들어갔다. 작은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공간이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배가 고팠다. 다이소를 돌면서 걸었던 거리와 세찬 바람, 흔들리던 우산이 생각났다. 그때는 몰랐는데, 몸이 꽤 지쳐 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은 조금 특별한 메뉴였다. 밍 어머니가 직접 끓여주신 경상도식 소고기 무우국, 그리고 밍이 만든 김밥전과 버섯구이.
경상도식 소고기 무우국, 깊고 부드러운 온기
밍이 냄비 뚜껑을 열자, 따뜻한 김이 퍼졌다. 국물은 깊고도 부드러운 색이었다. 육개장과 비슷한 듯하지만, 첫 숟가락을 뜨는 순간 차이가 느껴졌다. 육개장보다 훨씬 연하고, 더 담백한 맛이었다. 진한 국물임에도 속을 무겁게 누르지 않았다.
국물은 부드러웠다. 깊은 맛이 있었지만, 자극적이지 않았다. 혀끝에 닿는 순간부터 목을 타고 넘어가는 끝까지, 거친 부분 없이 깔끔하게 감싸줬다. 한입, 또 한입. 무가 국물을 가득 머금고 입안에서 사르르 풀렸다. 부드러운 소고기 조각이 씹을 것도 없이 녹아내렸다.
이 국물 속에는 시간이 녹아 있었다. 천천히 끓여낸 정성이 들어간 맛이었다. 나는 밍의 어머니가 이 국을 끓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떠올려 보았다. 오랫동안 고아낸 국물, 그 속에 배어 있는 다정한 손길.
그 마음을 국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김밥전, 그리고 그리운 집밥의 맛
국물에 한껏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 밍이 노릇하게 부쳐낸 김밥전을 건넸다.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김밥을 계란옷에 감싸 기름에 지져낸 요리. 계란과 김의 향이 가볍게 퍼졌다.
한입 베어 물었다. 순간, 익숙한데 오래 잊고 있던 맛이 입안에서 퍼졌다.
김의 고소한 맛, 계란의 부드러운 식감, 속에 단단히 말린 밥과 재료들이 어우러졌다. 너무 익숙한데,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분명 먹어본 맛. 아주 오래전, 부엌에서 들려오던 지글거리는 소리, 노릇하게 구워진 무언가를 건네받던 순간들.
김밥전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저먼 기억 속에서 잊고 있던 집밥의 온기를 불러왔다. 기억을 더듬으며 먹는 사이, 어느새 접시 위의 김밥전이 하나둘 사라졌다.
테이블 위에는 국물 한 방울, 노릇한 김밥전 한 조각, 버섯의 향이 스며든 접시가 남아 있었다. 식사를 끝낸 후에도,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국을 끓여준 밍의 어머니, 김밥전을 부치고 버섯을 구운 밍.
그리고 그 음식을 하나씩 떠먹으며 나누었던 대화 없는 시간.
이 식탁에는 많은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이 좋았다.
그리고 이 밤이 좋았다.
᯽ 밀랍이 녹아내리는 시간
작은 불꽃이 흔들렸다. 방향초의 심지가 서서히 타들어 가면서 공기 속으로 은은한 향이 퍼졌다. 그 위에 얹은 금속 스푼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왁스 조각을 하나 집어 스푼에 올렸다. 처음엔 그대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모서리부터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반죽처럼 흐물거리던 조각이 결국 액체가 되어 스푼 안에서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 순간, 작은 마녀가 수프를 끓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는 눈을 반짝이며 녹아가는 왁스를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스푼을 살짝 기울이며, 흐르는 붉은 액체를 종이 위에 천천히 부어냈다.
왁스가 둥글게 퍼졌다. 따뜻한 기운을 머금은 채, 표면이 천천히 굳어갔다. 그 위로 도장을 꾹 눌렀다.
잠시 기다렸다가 떼어내자, 편지봉투 위에는 반듯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꼭 중세 귀족이 비밀 서신을 보내는 것 같은, 혹은 신비한 초대장이 탄생한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이 시간이 친구에게 작은 마법처럼 남았으면 했다.
편지를 쓸 때마다, 이런 즐거운 의식이 함께하길.
밀랍이 녹아내리는 시간처럼, 천천히 스며드는 기쁨이 함께하길.
᯽ 굳나잇
잠이 몸을 끌어당겼다. 오랜만에 찾아온 깊은 피로였다. 며칠 동안 이어졌던 얕은 잠, 흐릿한 의식 속에서 떠다니던 밤들. 눕자마자 몸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꿈을 꾸었는지, 밤이 길었는지 짧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을 뜨고서야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워치를 확인했다. 수면 점수는 아주 나쁘지 않았다.
어딘가 아쉬웠다. 뭔가 더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밤도 필요한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1 개 댓글
닉네임, 댓글 하나라도 작성 안하면 등록 버튼이 비활성화 됩니다. 원래 경고창이 떠야했는데 제 지식이 부족해서 구현이 안돼요ㅠㅠ 안내문구 남겨드립니다.
한편의 단편소설을 읽는 듯 했어요 ,
그때가 떠오르고 이제는 우리에게 추억이 된 시간이네요 🙂